드라마 <정년이> 원작 웹툰작가 서이레 동문 "여성국극 이야기, 전공 수업에서 처음 접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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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성자 커뮤니케이션팀
- 인터뷰자
- 작성일 2024-11-05
- 웹툰작가 서이레 동문(필명·한국어문학부 11) 인터뷰
'춘향이부터 향단이까지, 다시 방자부터 이몽룡까지, 배우는 전원 여자다'
1950년대, 많은 소녀의 마음에 불을 붙인 장르가 있다. 바로 여성들이 공주, 왕자, 사또 등 모든 역할을 연기하는 '여성국극'이다. 이러한 여성국극이 세월이 흘러 웹툰과 드라마로 새롭게 탄생해 다시 한번 대중들의 마음을 사로잡고 있다.
서이레(필명·한국어문학부 11) 동문은 웹툰 <정년이>의 스토리 작가로 대중에게 낯설었던 여성국극을 콘텐츠로 만들어 널리 알렸다. <정년이>는 목포에서 조개를 팔며 소리를 하던 정년이라는 소녀가 우연히 여성국극을 접하게 되고, 최고의 여성국극 배우가 되기 위한 성장기를 담았다. 이 작품은 2024년 부천만화대상에서 대상을 수상했고, 현재 동명의 tvN 드라마 <정년이>로 재탄생해 드라마 화제성 1위라는 쾌거를 이루고 있다.
<정년이> 외에도 웹툰 <라나>, <소녀행>, <보에> 등 다양한 작품의 스토리 작가로 독자들의 많은 사랑을 받는 서이레 동문의 이야기를 숙명통신원이 들어봤다.
1. 작가님이 창작한 작품인 <정년이>가 영상화되어 감회가 새로울 것 같습니다. 실제로 '정년이' 캐릭터를 드라마 주인공인 배우 김태리를 생각하며 썼다고 들었습니다. 직접 구성했던 캐릭터들을 실제 인물로 마주한 것은 어떤 기분일지 궁금합니다.
아직 드라마가 방영 중이라 이렇다 할 소감을 정리하기 어렵습니다. 4화까지 본 지금의 소회는 신기하다는 감각이 주요합니다. 여성국극이라는 종합예술을 웹툰으로 표현하면서 아쉬웠던 부분들, 소리나 춤, 연기 따위의 무대 구성을 보다 실감 나게 느낄 수 있어 즐겁습니다.
그리고 아무래도 신기했습니다. 실제 캐스팅으로 이어질 줄은 몰랐으니까요. 태리 배우뿐 아니라 다른 배우분들도 웹툰 내 인물과 잘 어울린다고 생각합니다. 한편으로는 이 배우들, 드라마 제작진이 보고 느낀 <정년이>가 어떻게 표현될지 궁금했습니다.
2. <정년이>의 주제인 '여성국극'이라는 소재를 대학 시절 전공 서적에서 처음 접했다고요.
학부 수업에서 창극사(唱劇史)를 공부할 때 여성국극을 짧게 다뤘어요. 처음에는 별다른 생각은 없었어요. 그 수업 시간엔 저녁을 뭘 먹을까 고민하고 있었던 것 같거든요. 그러던 중, 수업을 같이 듣던 친구가 여성국극에 꽂혀서 제게 논문 한 편을 소개해 줬어요. 여성국극단 내 동성친밀성에 관련된 논문이었는데 제게는 논문이라기보다 에피소드 모음집처럼 느껴졌어요. 여성들만으로 이뤄진 극단이 있었다는 것도, 배우와 팬 사이의 관계도, 단원들의 관계도 너무 재미있었기에 반드시 웹툰으로 만들어야겠다고 생각했어요.
3. 올해 7월 <정년이>로 제21회 부천만화대상에서 대상을 수상했고, 최근 드라마 <정년이>가 방영되며 연재 당시 못지않은 관심을 다시금 받고 있습니다. <정년이>가 이렇게 사랑받을 수 있는 이유는 무엇이라고 생각하시나요?
사실 잘 모르겠어요. 저는 항상 좀 재미없고 대중성과는 거리가 먼 이야기를 하던 사람이라고 생각해서 여전히 잘 모르겠어요. 다만 <정년이>를 구성하는 다양한 요소들, 예컨대 여성혐오나 페미니즘 의제, 퀴어, 여성예술 등에 매력을 느끼는 사람이 많구나 싶어요. 보통 마이너한 주제로 분류되는데 말이에요.
4. 2015년도에 데뷔해서 벌써 10년 차 스토리 작가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어떤 계기로 작가가 되셨나요?
어린 시절부터 막연히 작가가 되겠다고, 되어야겠다고 생각했어요. 숙명여대 진학을 결심한 계기도 스토리텔링 연계전공이 있어서였어요. 입학 후에도 소설을 계속 썼습니다. 학부 동기들과 글 쓰는 모임을 만들어 활동했던 기억이 나네요. 그러다가 보다 대중적인 이야기를 만들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이후 우연히 가지고 있던 기획서를 웹툰으로 만들어 보자는 제안을 웹툰 에이전시로부터 받았고 만화도 좋아했기에 자연스럽게 웹툰 스토리를 쓰게 됐습니다.
5. 작가님의 작품을 보니 여성이 주도적으로 이야기를 이끌어가는 '여성 서사' 장르에 대중들이 더 익숙해질 것으로 기대됩니다. 다양한 여성의 이야기를 그리게 된 계기가 있나요?
제가 다양한 인물을 그리는 걸 좋아해요. 이런 사람, 저런 사람이 있고 그들이 얽히고설키는 과정에서 촉발되는 감정을 지켜보는 걸 좋아해요. 재미있잖아요. 그게 특별히 여성인 이유는 제가 여중·여고·여대를 나와서 그런 것 같아요. 주변에 여자들이 늘 있었어요. 결국 제가 잘 아는 사람들 얘기를 하게 된 거죠.
6. <정년이>의 정년이, <라나>의 라나, <소녀행>의 혜 등 작가님의 작품에는 정말 개성 있고 매력적인 여성 캐릭터들이 등장합니다. 단순하게 강한 여성 캐릭터만을 넘어서서, 다양한 여성상을 표현하신다는 점이 인상 깊은데요. 이렇게 다양한 여성 캐릭터를 창조할 때 어떤 점에 가장 많이 신경을 쓰시나요?
이 인물이 무엇을 원하는지 고민합니다. 서사에서 인물은 크든 작든 모두 자기만의 욕망을 갖는데요. 인물이 자기가 갖고 있는 욕망에 따라 행동하고 움직여야 사람같이 느껴지거든요. 즉 인물이 그럴듯한 행동과 말, 선택을 하고 있는지를 늘 생각합니다.
예를 들어 <라나>에서 주인공 라나는 자기 자신의 삶을 살고자 하는 욕망이 강한 인물이에요. 라나는 멸망한 지구를 구할 수 있다는 메시아를 임신한 사람인데요. 사람들에게 사랑받는 성모로 살기보다 욕먹더라도 자기 자신으로 살고 싶어 하거든요. 이런 라나의 욕망이 이야기 전체를 이끕니다.
<정년이>에서 영서는 어머니에게 인정받고 싶은 욕망을 가진 친구예요. 영서의 완벽주의 성향, 정년이에게 지고 싶어 하지 않는 마음, 주란이와의 갈등까지. 모두 이 욕망에서 비롯됩니다.
7. <정년이>, <라나> 등 늘 다양한 소재와 배경, 캐릭터들로 독자들의 마음을 사로잡고 있는데요. 작품을 기획하고 이야기를 쓸 때 주로 어디에서 영감을 얻으시나요?
특별히 영감을 얻는 곳은 없습니다. 저는 창작자로서 재능이 있는 사람은 아니어서 예전부터 항상 작품을 열심히 보고, 듣고, 읽지 않으면 안 됐어요. 앞서 여성국극을 알게 된 것처럼 보통은 공부를 합니다. 그렇게 평소에 공부한 내용이 결국 창작에 도움이 됩니다.
최근에는 이주노동자에 대한 글을 읽고 있습니다. 특히 미등록 이주아동에 관심을 갖고 있어요. 요즘 갑자기 축구도 좋아하게 돼서 국내외 가리지 않고 축구 경기도 보고 있습니다.
8. 작가님 작품 속에 등장하는 캐릭터 중 본인과 가장 비슷하다고 생각하는 캐릭터는 누구인가요?
제 작품에는 항상 그 작품을 쓰던 당시의 제가 묻어있는 것 같아요. <보에>를 쓸 때는 설경과 정겨운이 저와 닮아있었고, <라나>를 쓸 때는 라나와 제가 닮은 점이 많았어요. <정년이>를 쓸 때는 예상외로 전혀 의도하지 않았지만, 정년이와 제가 닮았다는 말을 많이 들었는데요. 개인적으로는 <정년이>에서는 백도앵과 비슷하다고 생각합니다.
그중에서도 <정년이>의 백도앵은 매란국극단의 단장 강소복의 조카입니다. 양인 집안 외동딸로 태어나 아버지의 손에 아들처럼 자랐습니다. 집안은 가난해도 양반의 딸이니 열심히 공부를 시켰고 도앵이도 그런 자신에게 자부심이 있었겠죠. 그런데 그만 여성국극에 푹 빠진 거예요.
당시 여성국극은 기생 놀음이라는 비난을 받기도 했기 때문에 도앵이는 여성국극 무대에 오르고 싶다는 욕심으로 극단에 들어온 것이지만, 자기 내면에 있는 소위 몸을 파는 여성들에 대한 혐오 때문에 소리 연습만큼은 게을리합니다. 저도 4년제 대학을 나온 엘리트 여성이고 그래서 저도 모르게 갖고 있는 혐오가 있거든요. 가끔 그런 자신을 발견할 때 스스로에게 놀라곤 합니다. 혐오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 여성이라는 점, 그런 자신을 스스로 알고 있다는 점에서 비슷하다고 느낍니다.
9. 학부생 시절부터 글을 썼다고 들었는데, 당시에 글을 쓰면서 가졌던 고민이 있었나요?
저는 당시 저 스스로가 타인에게 관심이 없는 사람인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나는 내게만 관심이 있고 나만 궁금한 사람일지도 모르겠다’라고 생각했죠. 그런 사람이 쓴 이야기는 재미도 없고 다른 사람을 감동하게 하지도 못할 것 같았기 때문에 그저 취미로만 글을 써야 하는 게 아닐까 싶어 고민하고 있었습니다.
이런 생각에 빠져있을 때, 세월호 참사가 벌어졌습니다. 지금 느끼는 무력감과 모욕감, 불합리함을 뭐로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고민하기 시작했어요. 내가 그나마 잘하는 것이 창작이라면 이걸 통해 세상과 제가 느끼는 이 감정들을 이해하려는 노력을 해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때부터 조금씩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가 무엇인지, 이야기에 어떤 사람을 담고 싶은지를 고민하기 시작했어요.
10. 숙명에서 글 작가 활동에 도움이 된 활동이 있나요?
앞서 말한 것처럼 글쓰기 모임을 만들었어요. 지금은 퇴직하신 한국어문학부 최시한 교수님께서 제발 소설 좀 써서 갖고 오라고 하셔서 글쓰기 모임을 만들고 본격적으로 활동하게 됐어요. 한 달에 단편 소설 한 편 완성을 목표로, 일주일에 한 번씩 만나서 쓴 내용을 공유하곤 했죠.
그때 쓴 소설 내용, 함께 나눈 이야기들은 사실 이제 거의 떠오르지 않아요. 대신 친구들과 즐겁게 창작을 한 경험은 오롯이 남아있어요. 모임원들이 모두 문학과 창작에 진심이었거든요. 친구들의 열정과 성실함을 보면서 이 모임이 오래오래 계속됐으면 좋겠다, 우리가 계속 창작을 하면 좋겠다고 생각했어요.
11. 앞으로 작가 서이레로서 혹은 인간 서이레로서 이루고 싶으신 목표는 무엇인가요?
제가 계속 괴로워할 줄 아는 사람이었으면 좋겠어요. 그렇게 사람들의 고통을 이해하고 공감할 줄 아는 사람으로 남고 싶어요.
12. 작가님의 작품 속 정년이처럼 자신의 꿈을 향해 달려가고 있는 숙명여대 후배들에게 조언 한마디 부탁드립니다.
제가 조언을 할 수 있는 사람인지 모르겠어요. 제가 학부생일 때와 지금은 상황이 매우 다를 것 같거든요. 그래서 조언보다 응원을 드리고 싶어요. 드라마 <정년이>에서 정년이의 언니 정자가 그런 말을 해요. 꿈이 있다는 것도 다 네 복이라고. 그러니 몸과 마음 모두 건강히 자신의 복됨을 누리시길 바랍니다.
취재: 숙명통신원 22기 김규나(홍보광고학과 21), 23기 이세은(독일언어·문화학과 24)
정리: 커뮤니케이션팀